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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특정 시기를 정확히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소년시절의 너 (Better Days, 2019)》 이 영화는 과거를 회상하게 하지 않고, 그 시기로 되돌려 놓는다《소년시절의 너》를 보는 동안, 나는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는 감각보다 과거에 다시 머물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흔히 학창 시절을 다룬 영화들은 추억이나 반성의 형태로 기억을 호출하지만, 이 영화는 그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회상의 안전한 틀 안에서 과거를 바라보게 하지 않고, 그 시절의 공기와 감정을 현재형으로 재현한다. 그래서 관객은 기억을 ‘생각’하기보다 다시 ‘겪는’ 상태에 놓인다.영화 속 학교는 특정 국가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폐쇄된 세계처럼 묘사된다. 성적, 평가, 시선, 소문이 모든 관계를 규정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감정은 쉽게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구조는 낯설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형태의 시간.. 2026. 2. 12.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솔직해서 숨기고 싶은 영화 《블루 발렌타인 (Blue Valentine, 2010)》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에는 언제나 약간의 망설임이 따른다《블루 발렌타인》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늘 조심스럽게 나온다. 이 영화가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감정이 얕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 노골적이며, 관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지나치게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마치 자신의 어떤 경험이나 태도까지 함께 공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랑을 다룬 영화에서 일정한 정서적 안전망을 기대한다. 갈등이 있더라도 이해 가능한 서사로 정리되기를 바라고, 이별이 등장하더라도 의미 있는 결론이나 성장의 흔적이 남기를 원한다. 그러나 《블루 발렌타인》은 그러한 기대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관계가 왜.. 2026. 2. 12.
처음 볼 땐 몰랐고, 지금의 내가 돼서야 이해된 영화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그때는 이야기로 보았고, 지금은 시간으로 읽히는 영화《이터널 선샤인》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영화는 독특한 설정을 가진 사랑 이야기로 인식되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발상, 비선형적으로 전개되는 서사, 감정과 상반되는 장면의 배열은 신선했지만, 그 신선함은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차원에 머물렀다. 영화는 흥미로웠고 인상적이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그때의 나는 이 영화를 하나의 기발한 로맨스로 이해했다.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마주한 《이터널 선샤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이 보였다. 기억이 삭제되는 장면 하나하나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관계가 지나간 순서를 되짚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영화는 사랑의 시작이나 끝을 보여주.. 2026. 2. 11.
“이 장면은 왜 이렇게 불편했을까”를 곱씹게 만든 영화 《더 랍스터 (The Lobster, 2015)》 웃고 있었지만, 분명히 불편하다는 감각이 먼저 도착했다《더 랍스터》를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인식된 감정은 웃음이었다. 영화는 분명히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설정 자체가 기이하고 과장되어 있다. 배우들의 무표정한 연기와 비현실적인 규칙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황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웃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불편함은 공포나 슬픔처럼 즉각적인 감정이 아니라, 뒤늦게 인식되는 감각에 가깝다.사람들은 정해진 기간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게 된다. 이 설정은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규칙은 점점 농담의 영역을 벗어난다. 관객은 .. 2026. 2. 11.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계속 떠오른 영화 한 편 《언더 더 스킨 (Under the Skin, 2013)》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오래 남은 감상이 되었다《언더 더 스킨》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영화를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서사는 불친절했고, 인물의 목적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았으며,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결 또한 관습적인 영화 문법과는 거리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끊임없이 해석의 실마리를 찾았으나, 끝내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 이후 이상할 만큼 오랫동안 이 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의 가장 선명한 인상이 되었다.일반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화는 빠르게 잊힌다. 의미를 붙잡지 못한 채 남겨진 이미지는 곧 다른 이야기들에 의해 덮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더 더 스킨》은 그렇지 않았다. 명확한 해석에 실패했음에도 .. 2026. 2. 11.
엔딩을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아무 영화도 볼 수 없게 만든 영화 《애프터 선 (Aftersun, 2022)》 끝났다는 감각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영화가 끝났음을 인지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화면이 암전되고 음악이 멎은 직후, 분명하게 남은 감각은 ‘이야기가 끝났다’는 확신이 아니라 ‘되돌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애프터 선》은 관객에게 결말을 제시하기보다, 시간의 비가역성을 체감하게 만든다. 서사의 완결이 아니라, 지나가 버린 순간들에 대한 감각이 엔딩 이후까지 지속된다. 이 영화가 남기는 여운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조용한 고착에 가깝다.영화는 의도적으로 극적인 사건을 배제한다. 휴가지의 일상, 햇빛이 머무는 수영장, 파도 소리, 흔들리는 캠코더 영상 등은 특별할 것 없는 풍경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함이 감정의 무게를 증폭시킨다. 비극은 언제나.. 2026. 2. 10.